카테고리 없음

말과 빛이 사라지는 순간, 남겨진 기억 – 『희랍어 시간』을 읽고

essay3414 2025. 2. 6. 23:29

한강 작가님의 작품들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을 여러 번 읽어야 하고,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렵다고 해서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주인공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고, 감각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요.


이번에 읽은 『희랍어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부분이 어렵게 느껴졌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무언가 작가님이 조용히 속삭여 주셨던 듯한, 깊고도 뜻있는 이야기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단번에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듯했습니다. 마치 서서히 스며드는 빛처럼요.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노력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한 남자입니다. 한 사람은 언어를 잃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점점 시야가 좁아집니다. 말과 빛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게 됩니다.

한강 작가님은 언어를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몸과 연결된 실체로 그려내십니다. 언어는 단순한 단어들의 조합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기억이며, 몸이 간직하고 있는 감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말을 잃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대화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는 과정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상실 속에서도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하고, 되새긴다면,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희랍어, 잊히는 언어가 전하는 의미


이 작품 속에서 ‘희랍어’는 단순한 고대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은유이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희랍어는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언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역사가, 기억이,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주인공이 희랍어를 배우려 하는 과정은 단순한 언어 학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흘러온 언어를 붙잡고,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노력처럼 느껴집니다. 희랍어를 배운다고 해서 과거가 완전히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읽고 말하는 순간, 그 언어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은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일까?



육체와 감각, 그리고 시간의 흐름


한강 작가님의 문장은 마치 시(詩)처럼 읽힙니다. 단순한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조각난 문장과 단어들이 모여 감각적인 세계를 형성합니다. 주인공이 손끝으로 만지는 감촉, 공기의 흐름, 어둠 속에서 빛을 느끼는 순간들이 세밀하게 묘사되며, 독자는 단순히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을 함께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러한 문체는 언어 자체의 물성을 느끼게 합니다. 문장은 단순한 의미 전달이 아니라, 마치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처럼 다가옵니다. 언어가 몸과 연결되어 있다는 작품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이러한 감각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개념 또한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기억은 과거에 속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감각으로 이어질 때, 과거와 현재는 연결됩니다. 주인공이 희랍어를 배우면서, 사라진 언어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죽음과 탄생, 그리고 새로운 몸


작품을 읽으며, ‘죽음과 탄생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이 말을 잃어가는 것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변모하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죽음과 탄생이 새로운 몸을 얻어 환생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환생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감각과 기억이 어떻게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완전히 몰락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소설이 우리에게 있었던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책을 덮고 난 후, 남겨진 울림


한강 작가님의 작품들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깊은 울림을 경험합니다. 단순히 한 번 읽고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번 곱씹으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작품들입니다. 『희랍어 시간』 역시 그랬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무언가 작가님이 제게 속삭여 주셨던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책을 펼치면, 또 다른 속삭임을 듣게 될 것만 같은 이야기.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반드시 남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준 소설. 언어와 감각, 시간과 기억,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 준 소설.

쉽지 않았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이야기.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이 스며드는 이야기.

한강 작가님의 『희랍어 시간』 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어렵지만, 끝까지 함께 걸어가고 싶은 이야기. 『희랍어 시간』이 여러분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